교육/학습과 배움은 무엇이 다를까? 왜 배움사회일까?
나를 세우는 힘, 배움임자로서 살맛 나는 배움 누려야
교육권/학습권 아우르는 배움 누릴 권리 관점 바꿔야
(여는말) ”교육/학습과 배움은 무엇이 다르고 왜 배움 사회인가?“
안녕하십니까 열린시민뉴스 김상민입니다. 오늘은 참배움연구소장님이신 김두루한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오늘 나눌 주제는 ”교육과 배움은 무엇이 다르고 왜 배움 사회인가?“입니다. 잠깐 자기소개 해 주시죠.
☞ 여러분 반갑습니다. 참배움연구소장 김두루한입니다.
세상은 물음과 답으로 이뤄집니다. 대한민국 학교에서 교육은 어떤가요? 정해진 답만 익히길 요구하고 시험으로 줄을 세웁니다. 수능시험처럼 주어진 체제에 순응하길 요구합니다. 우린 19-20세기 제국주의를 거쳤습니다. 근대 지식을 습득하고 모방하며 전달하는 학교가 연장이 된 교육/학습사회에서 경쟁하며 삽니다.
21세기는 인공지능과 공존하는 배움 시대입니다. 지식전달보다 세상 이치를 내 스스로 묻고 따지며 깨치는 창조형 미래배움이 소중합니다. 교육대상에 머물지 않고 저마다 배움 임자가 되어 나를 세우는 배움, 맞닥뜨린 문제를 임자답게 풀어나가는 배움이 바탕인 배움사회체제를 만들 때입니다. 스스로 느낀 것을 바탕으로 묻고 생각하며 따지는 참배움이 필요합니다. 참, 온, 늘배움을 갈고 닦고자 합니다. 새롭게 창조하며 참삶을 누리는 배움사회를 이룩하고 싶습니다.
(물음1) 우리가 ‘배운다’고 말할 때 배움이란 뜻이 뭡니까?
소장님, 제 경우는 1967년 초등학교를 들어가고 1979년도에 대학을 들어갔어요. 오늘날까지 교육이나 학습한다는 말도 쓰고 또 배운다는 말도 더러 씁니다. 도대체 우리가 ‘배운다’고 말할 때 배움이란 뜻이 뭡니까? 어떤 이데올로기도 있는 것 같고요. 소장님께서는 이 말들을 어떻게 구분해서 쓰시죠? 아울러 교육 사회, 학습사회, 배움 사회가 뭔지 궁금합니다. 체계가 어떻게 다른가요?
☞ 정말 필요한 질문이고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데 당장 맞닥뜨린 숱한 문제를 풀 수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요즘 오펜하이머라는 영화 아시죠? 예 봤습니다. 핵은 융합이 되기도 하고 분열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듯이 실제로 사람이 살아갈 때 힘이 필요한데 그 힘이 어디서 나오고 그것을 어떻게 우리가 살려내고 이런 게 중요하죠. 그 힘을 놓고 본다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정답이 아닙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물음입니다. 물음.
그래서 그런 물음을 놓고 이제 한번 그동안 우리가 공부 그러면은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교육도 있고 학습도 있고 배움이 있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데요. 교육하고 학습에도 배움이라고 하는 게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교육이나 학습은 어떤 점에서는 진짜 배움이 아닌 거죠. 물음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일단 우리가 교육을 생각할 수 있죠. 교육은 내가 묻는 게 아니잖아요? 학습은 어떻습니까? 학습은 내가 묻긴 묻는데 주어진 물음에 내가 답하는 거예요. 답이 정해진 거예요. 어떤 틀 자체는 그렇습니다. 그러면 내가 스스로 묻는 물음을 바탕으로 한 배움은 뭐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이 문제를 제 나름으로 학교 현장 생활을 하면서 숱하게 고민했죠. 내가 묻고 내가 깨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교육이나 학습 가르침과 익힘과 구별해야겠구나. 이것을 배움이라고 부를 필요가 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물음2) 우리 교육 문제, 뭐가 문제이고 어떻게 풀 수 있나요?
이제 단순히 어떤 지식을 얻는(취득하는) 과정이 아니란 것이죠. 그렇죠. 스스로 자기 주도형으로 임자(주체)가 돼서 뭔가 배워 나간다든지 그런 것으로 보이네요. 아무튼 우리 사회가 교육 문제만큼 누구나 관심은 쏟죠. 어떻게 보면 제일 불만도 많고요. 도대체 우리나라 교육이 뭐냐? 도대체 왜 이렇게 교육이 후진적이지? 학교 현장은 그냥 거의 황폐화돼 있고 그렇게 많은 예산을 들였는데 왜 이런 문제가 일어나나요? 지금 국민들은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어디서부터 해결해야 할지 고민이 엄청 커요!
☞ 네 그 문제는 이제 우리가 길을 간다고 했을 때 내가 처음에 길을 모를 때는 길잡이가 있어요. 그 길잡이를 따라가기만 하면 돼요. 그런데 그 길만 따라만 가서 되는 게 아니고 어떤 순간에 내가 새로운 길을 열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 새로운 길을 여는 게 제가 말씀 드리는 배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배움인 거죠. 그러면 길을 따라가는 건 뭐냐? 그것은 정해진 길을 따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또는 내가 가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가는 어떤 그런 경우이기도 하고요. 이런 경우를 우리가 교육이라고 하는 거죠. 그런데 이 교육은 우리 역사에 견주면 식민 교육입니다. 내가 임자가 돼서는 안 되는 교육이죠. 그 연장선에서 독재를 또 하지 않습니까? 주어진 길을 흔히 일본말로 교육과정이라 하죠. 주어진 틀 속에서 따라가거나 억지로 끌려가거나 길들임을 당하거나 할 수 있죠.
(물음3) 선생님들이 죽고 있어요! ‘교권’ 문제 근본 원인은 뭘까요?
국민학교라는 말을 우리 때는 썼는데 버리고 초등학교라고 쓰고 있죠. 이전에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는 군국주의 병사를 길러내는 병영과 같은 것이었죠. 툭 하면 막 구타 뭐 이런 것들이 어마어마하게 일어나고요. 아마 안 맞은 학생들이 없을 것입니다. 당시는. 지금은 너무 방임적인 듯도 하고요. 학생들을 훈계하게 되면 학생 인권을 침해한다며 학부모 악성 민원도 많고요. 서이초 선생님으로 떠올랐는데 여러 선생님들이 죽어가고 있고요. 교육권이 무너지고 있는 요즘인데 이런 엄청난 사회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은 뭡니까?
☞ 줄 세우기죠. 줄 세우기, 경쟁이라고 하는 건데 경쟁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거든요. 운동 경기는 어떤가요? 운동 경기는 이제 우리가 운동 경기를 하더라도 이기고 지고보다는 그야말로 몸과 마음을 수양하는 것인데 그게 요즘은 이제 ‘돈’과 연결해 이른바 프로라고 하지 않습니까? 연봉이라든지 이런 걸 많이 이야기하는데 그런 게 있지만 삶은 그런 것만 있는 게 아니고 어제의 나랑 경쟁하는 것도 있거든요. 남이 아니고 나를 스스로 갈고 닦고 내 스스로 정해놓은, 나름대로 꿈꾼 것을,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있거든요. 그걸 이전에도 말하길 나 세우기(위기지학)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이제 줄 세우기가 막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박정희 유신 독재나 그 이전 이승만, 미군정, 그 이전 이른바 왜정 시대 때 통치를 받지 않았습니까? 여기는 하나의 정해진 틀 속에 ‘나’는 없고 줄 세워진 가운데, 주로 이제 시험 공화국이라는 말로 남아 있는데요, 시험만 치르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 적은 수의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이 생기고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세상에 태어나서 내 나름대로 누구나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하고 싶은 일 또는 맡아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있거든요. 그런 걸 이제 우리가 살려야 되는데 그걸 학교라는 곳에서 오히려 방해하고 통제받고 억압당하다 보니까 우리가 제 뜻을 펴지 못하게 되죠.
(물음4) 경쟁하는 학교와 사회 체제를 어떻게 바꿔야 할까요?
그러니까 경쟁하고 줄세우기 하는 것이 이제 우리 교육 문제에서 근본 원인 중에 하나라고 볼 수가 있는데 그러면 앞으로 이러한 사건, 이처럼 경쟁하는 학교와 사회체제에서 교육 현장을 바꾸려고 하면 어떤 대원칙이랄까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것들이 있습니까?
☞ 예 그렇죠. 아까 말씀드렸지만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힘입니다 힘. 근데 그 힘은 어디서 나오냐 하니까 정해진 답을 익혀가지고 그걸 가지고 그대로 따라하는 데서는 나오지 않아요. 힘은 항상 새롭습니다. 그 새로운 힘은 바로 물음에서 나오는 겁니다. 우리가 흔히 잘 나가는 강대국 USA 같은 나라에서 하바드를 예를 들어봅시다. 대학이 있잖아요. 그 대학은 무엇 때문에 큰 힘을 갖게 되느냐? 모방이 아니고 창조할 때 그 힘이 생기는 거고요.
오펜하이머는 바로 그 맨해튼 프로젝트를 추진했죠. 그것이 당대 유럽과 US에서 능력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핵폭탄을 만든 것이죠. 그 핵폭탄을 만들며 종합되는 과정 속에서 힘이 모이는 거죠. 네 그런데 현재 우리들 학교는 어떤 모습이냐 하니까 우선 학교를 보는 눈이 잘못돼 있어요. 학교를 어떻게 봐야 될까요? 학교는 유토피아일까요? 디스토피아일까요? (학교가 지금 현실은 디스토피아) 그렇죠 현실이 디스토피아라는 얘기는 뭐냐 하니까 우리가 학교 보는 눈이 그만큼 좁다는 겁니다. 학교가 유토피아가 되면 학교를 거친 사람들이 ‘교복 입은 시민’이 아니라 유토피아, ‘꿈과 열정을 지닌 시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회가 바뀌는 거거든요. 네. 그래서 교육 사회가 있고 학습 사회가 있는데 그것을 뛰어넘어서 오늘날 우리가 배움 사회를 이룩해야 되겠구나! 그 바탕이 되는 건 뭐냐?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교육권이나 학습권에 얽매일 게 아니라 오히려 그런 것들을 아우르는 배움권이라고 하는 배움이라는 본능이 있다란 것을 살려야죠. 배움권을 나라가 뒷받침해주고 우리 서로가 배움을 이루어가는 것이 바탕이라고 하는 깨침, 관점을 바꾸면 생각보다 이 어려운 난국을 쉽게 풀어낼 수가 있는 거죠.
(물음5) 배움사회로 나아가는 관점에서 교권 관련법 개정 방향은요?
줄세우기 경쟁을 없애고 배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제 진짜 사회적으로 예를 들면 지금 교권이 많이 무너지고 있어요. 뭔가 헌법이나 법률 제도로 보장하는 것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대규모 20만 명 30만 명씩 학교 선생님들이 계속 대규모 집회를 열고 있는데 말이죠. (그렇습니다.) 지금 어떤 방향으로 법을 개정하고 바꾸어야 하는지 그 얘기를 들려주시죠.
☞ 이제 우선 헌법 31조를 보면 교육을 받을 권리라고 표현이 돼 있어요. 우리 한번 이 시점에서 살펴봐요. 21세기가 교육 시대나 학습 시대인가요? 우리가 살아갈 때 정해진 어떤 답에 얽매이는 것이 권리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창조하려면 모방에서 벗어나려면 배움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관점에 서야 합니다. 그러니까 헌법을 바꿔야 하겠죠. 헌법을 바꾼다는 것은 그 아래 법령들이 다 바뀐다는 것을 뜻합니다. 현재까지는 교육을 받을 권리라고 해서 교육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대착오입니다. 교육권은 근대 국가가 행사하던 때에서 교사가 교육권을 행사하는 단계까지는 왔죠. 하지만 학생이 학습권을 강조하고 있어요. 둘 다 그것이 갖는 한계가 뚜렷합니다. 왜일까요? 교육이나 학습은 새로운 질문, 새롭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돕는 게 아닙니다. 배움을 오히려 방해할 뿐이죠. 시험을 본다는 거 있지 않습니까? 수능이라고 하죠. 수능을 한번 다시 한번 소리 내보세요. 한번 해볼까요? 순응-[수능]-은 순응한다. 순응하게 하는 거죠. 우리나라에서 현재 치르는 수능 시험은 대학 수학 능력 시험의 준말이라고 하는데요. 가짜 수능입니다. 쉽게 말하면 힘이 안 길러져요. 줄을 세워서 등수는 구별되는데 실제로 거기에 시험을 치르고 나면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내 자신을 미워하거나 싫어하게 되죠. 왜 그럴까요? 바로 현재 치르는 수능은 줄 세우기에만 관심을 두고 있지 저마다 나 세우기를 돕는 시험이 아니라는 겁니다. 나세우기를 돕는 그런 시험이 어디 있을까요? 유럽이라든지 다른 나라에서 얼마든지 하고 있는 게 바로 뭡니까? 질문은 몇 개 안 되고 짧은데 답은 사람들마다 여러 가지죠. 그런 시험을 보고 있는 것이거든요. 그걸 논술이라고 하죠. 구술이라고도 하고 그런 시험이 겉만 봐서는 안 되고 똑같은 질문을 문제를 놓고 수십만 명이 거기에 그것도 답이 있는 걸 OMR 카드에 기록하게 하는 것은 사람을 개나 돼지로 만드는 일이죠.
(물음6) 배움사회로 나아가는 관점에서 시험능력주의 문제점은요?
과거에 우리 사회가 실은 굉장히 불평등합니다.(그렇습니다) 이러니까 식민지 시대 때도 마찬가지지만 대다수는 식민지 착취적인 개념이 여전해요. (많이 억눌려 있죠.) 일부만 체제를 유지하는 소수 사람들만 그야말로 특권, 기득권층이잖아요. 우리 사회에서 지금 보면 교육이 곧 시험으로 인식이 되는데 소수만 특권층이 되어 성공(?)하고 나머지는 다 실패죠. 또 ”너희들은 공부를 못했으니까 그런 대접을 받는 것이 당연해. 사회적으로 불평등한 대접을 받는 것이 다행이라고“ 하며 세뇌하고요. ”참 못난 나라에 태어나서 내가 힘들지 내가 공부를 못해서 내가 힘들게 살지.“ 이렇게 제 탓하며 말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아주 굉장히 무서운 이데올로기가 ‘교육’에 숨어 있다고 봐요.
☞ 그렇죠. 그것이 이제 잘 드러난 게 국민교육헌장이죠. 국민교육헌장은 393자로 돼 있는데 1968년도에 국민교육헌장이 만들어진 뒤로 이 나라가 어떤 모습이 됐죠? 바로 유신 독재로 넘어가게 되었죠. 유신 교육을 받은 세대가 어느덧 대통령이 되고 장관이 돼서 지금 우리나라를 이끌고 있고요. 국민교육헌장이 갖고 있는 가장 큰 모순 맹점은 뭐일까요? 그러니까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 그랬잖아요? 새 역사가 뭔지에 대해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려면 바로 뭘 해야 합니까? 줄 세우기를 없앨 생각을 해야 하겠죠. 그게 평준화라고 하는 껍데기는 취했는데 고등학교가 평준화됐다고 하지만 오늘날까지 자사고 파동을 겪고 있고 대학이 줄 서 있잖아요.
(물음7) 배움사회로 나아가는 관점에서 교육 문제 해결방안은?
소장님도 1960년생이면 현재 윤 대통령과 같은 나이네요. 대담하는 저도 나이가 같습니다. 아무튼 우리 학창 시절 당시 분위기는 그야말로 반공 교육하고 국민교육현장을 전부 다 외게 했었죠. 군국주의로 마치 식민 통치받은 때처럼 세뇌 교육을 받은 것이죠. 소장님이나 저나 대학을 다니면서 공부하고 비판 능력을 키우면서 그걸 벗어났다고 봅니다. 하지만 고시 공부에 얽매여 9수까지 한 현 대통령 같은 경우는 어떨까요? 딱 그 수준에서 아예 머물러 있지 않은가 하는 느낌이네요. 요즘 갑자기 뜬금없이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니까요. 그러니까 한 50년 전쯤으로 퇴행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거든요. 교육에 대해서도 얼마나 더 생각했을까요? 사교육 카르텔, 킬러 문제 등 수능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얘기하고 있죠. 교육 문제를 두고 대통령부터 나섰는데 도대체 교육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있습니까?
☞ 누군가가 무너뜨리고 망가지는 게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그것은 다시 일으켜 세우고 바로잡을 수가 있습니다. 자연을 보면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건데요. 과연 줄 세우기 대안이 뭐냐? 란 것이죠. 나 세우기라 여깁니다. 국민 교육헌장에서 보면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를 이야기하면서 ‘나’를 죽였어요. 하지만 어떤가요? 사실은 ‘나’들이 모여서 나라가 되는 거지 않습니까? 그리고 묻는 게 왜 중요하냐 하면 묻는 것은 답이 정해져 있지 않죠. 하나가 아니죠. 왜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6가지 물음이 있으면 적어도 왜 배우고 뭘 배우고 어떻게 배울 것인가를 우리가 물었어야 하죠. 배움임자로서 궁금하게 마련이죠. 그런데 (저마다) 물을 권리, 배움을 누릴 권리를 제대로 누리며 그런 삶을 형성했나요? 교육받고 학습하며 제대로 묻지 못하게 방해했죠. 왜? 시험을 대비해야 되니까요. 그렇죠. 평소에도 시험에 급급하게 됩니다.
(마무리) 배움 사회와 관련해서 한 말씀만 더 하신다면요?
오늘 이제 첫 시간인데 앞으로 교육 문제를 배움사회론으로 어떻게 풀어나갈지 이제 각론으로 들어가서도 죽 앞으로 부탁드릴게요.
☞ 교육/학습과 배움을 이제 어떻게 구별할까 했을 때 교육/학습은 나를 종으로 만드는 거죠. 길들임을 당하는 것이고 학습도 주어진 문제에 묶이게 하고요. 하지만 배움은 나를 임자로 만듭니다. 임자. 그래서 이제 모든 배움은 임자 깨침이어야 하죠. 임자 깨침일 때라야 참다운 배움이 될 수 있습니다. 자유와 평등, 진리, 정의 같은 가치는 반드시 배움꽃을 피워야 하죠. 내가 이전의 나와 다른 새롭고 슬기로운 생각과 느낌을 펼칠 수 있는 꽃을 피워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학교는 배움꽃이 피어나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육/학습사회는 이제 이전 낡은 시대의 유물(체제)이니까 과감하게 버리고 참삶을 누리는 참다운 배움 사회(체제)를 함께 이룩해 보는 게 어떨까요?
배움꽃이 피는 학교, 참다운 배움사회를 기대해 보겠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열린 시민 뉴스 김상민
참배움 연구소장 김두루한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김두루한 참배움연구소장 chambaeum@naver.com (《배움혁명》,《누리자!배움!》 ,《배움사회》 지은이/(배움길)경북대 문학사 전공/연세대 국어학 석사/ 상명대 문학박사/(지냄) 한양여고, 장충중고, 금천고, 신목고, 광양고, 경기상고, 경일고, 경기고,휘봉고 등 중등 교사, 상명대, 성결대,경인교대 강사,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정책위원/참교육연구소 중등새로운학교연구실장/한글학회 평의원/(재)외솔회 사무국장)
▲ 배움혁명 (김두루한 지음/도서출판 참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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